티스토리 뷰


북아프리카의 책임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유적지를 가다보면 놀라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현재의 황량한 풍경과는 전혀 동떨어진 거대하고 화려한 유적지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북아프리카 생산력으로도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은 유적지의 비밀은 단순하다. 고대의 북아프리카는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시대의 북아프리카는 본국 밀 소비량의 1/3을 생산할 정도의 곡창지대였다. 거대한 농장이 지평선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 제국이 건설한 수로와 가도를 통해 농산물이 생산되고 수송되었다. 이 시기의 북아프리카는 3세기에 로마 황제를 배출할 정도로 아찔한 생산력을 자랑했다. 그런 북아프리카가 현재와 같은 황무지로 변해 버린 것은 제국 붕괴 이후이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제국 붕괴 이후 공권력의 보호와 수로 보수와 같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농장이 소규모화 되거나 파괴되었다. 이를 가속화 시킨 것은 이슬람교의 도입이후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베르베르 족이었다. 베르베르 족은 유목민이었고. 목초지를 보존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종족이었다. 더욱이 이들을 통제할 공권력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는 북아프리카의 황무지화였다.

베르베르족은 양 같은 목축을 데리고 떠도는 생활을 계속 하면서 목초지를 끊임없이 파괴했다. 목초지가 황폐화되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그렇게 사막이 생성되었고. 북아프리카에서 과거의 영화는 사라졌다. 베르베르족의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이를 자승자박의 결과라고 말하긴 어렵다. 지중해의 계절풍과 같은 자연적인 문제도 존재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베르베르 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공적 조직이 있었다면 북아프리카의 황무지화는 어느정도 제어되었을 꺼라는 점이다. 개개인의 사적 욕심이 결과적으로 모두의 피해로 돌아갔을 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사적 욕심이 아니라 이를 적당히 제어하지 못한 공적 권력에 돌아가야 한다. 애덤 스미스도 말했다. 빵집주인의 욕심이 우리를 살찌우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지만 빵집주인의 욕심을 적당히 제어해 주지 못한다면 공황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공적 권력의 있고 없음에 따라 인간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알려면 북아프리카의 화려한 로마시대 유적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소극적 태도.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과 관련한 판결을 내렸다. 판결을 요약해 보면 '처리과정에서의 위법은 인정되나. 법의 효력 또한 인정한다.'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이 판결에 대해 '위폐는 인정하나 지폐의 유통 또한 인정한다.' 라고  촌철살인의 평을 내렸다. 그것만 듣는다면 헌법재판소가 마치 자신들의 역할을 방기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헌법재판소는 역할을 방기했기 보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마냥 헌법재판소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이유다. 입법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헌법재판소로 끌고 가 정치적 책임을 지우려고 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어찌되었던 헌법재판소는 입법부의 입법과정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법을 처리한 한나라당은 머리 싸매쥐고 반성해야 한다. 그걸 알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 이상의 판결, 그러니까 정치적 영역에 있는 방송법, 신문법의 위헌여부를  판결해달라는 요구에 헌법재판소가 난 책임이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있다. 어느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헌법재판소는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조직이 아니니까. 특별히 이번 사건과 같이 정치적으로 매우 휘발성이 강한 사건에서 헌법재판소가 내리는 결정이 적당한 타협에 근거한 소극적 태도일 수 밖에 없는 것도 이해는 된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사안이 민감한 경우 계속 소극적 판단을 내렸을 때 합리화 된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자신들의 역할을 항상 소극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관습헌법으로 대표되는 행정도시특별법에 대한 위헌판결에서 헌법재판소는 성문법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헌법에서 관습법을 들고 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이는 헌법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었다. 그리고 이 재판은 확실히 정치적 휘발성이 매우 강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이 대부분 서울 시내에 집을 갖고 있으며, 수도권의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정치적 휘발성이 강한 사안에 대해 어떨 때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어떨 때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단순히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결과라고 치부하기에는 찝찝하다.

 

사적 이익

 

찝찝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지독히도 사적 이익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 족에 대해 설명하면서 공적 권력은 사적 이익을 어느정도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마제국 역시 북아프리카의 속주총독이 매년 농장주들과 협상을 벌여 밀의 가격을 제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본국에 밀을 공급하려는 농장주들의 경쟁으로 인해 본국의 자영농이 몰락하고 이후에는 농장주들의 담합으로 인해 본국의 밀 가격이 좌지우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분별한 사적 이익의 탐욕은 겉으로는 효율적이고 생산성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로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는 그 효율성에 주목한 나머지 사적 이익의 탐욕을 공적 권력이 제어하지 못하는 사회로 봐야한다. 진보던 보수던 이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외면하고 있다.

강력한 공무원 계층, 검찰을 비롯한 사정기관의 권위. 대기업 노동조합의 비정규직에 대한 외면. 학계내 보수적 풍토. 건설,토건 업계의 막대한 로비력. 이 모두가 한국 사회를 겉으로는 효율화로 보게 만들지만 한꺼풀 벗겨 보면 각자의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이를 감시하고 제어해야 하는 공적 권력 역시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때로는 이에 동조한다는 걸 알 게 한다. 몇 년간의 노력으로 공무원이 되면 OECD 상위권의 기본급과 상여금을 받으며 퇴직 걱정 없이 편안하게 회사를 다니다가 퇴직하여 관련 사적 기관의 이사로 들어가는 것이 공적 권력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태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공적 권력을 사적 이익을 제어하는 형태로 운영할 수 있을까? 굳이 공적 권력을 운영하는 사람들만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이 사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최대한으로 유지하여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이다. 거기서 진보진영의 사람들도 별다른 차이는 없다. 전교조가 교원평가제를 반대하거나. 대기업 노조가 상여금을 늦게 줬다는 이유로 파업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자신의 사적 이익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선택이 아니라고 봐야하나?


 이를 덮어두고 모든 문제를 진보와 보수. 이데올로기와 능률의 대결로 몰아가는 것은 진보던 보수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몸부림에서 비롯된다. 한국 사회에는 '베르베르족'들이 너무나 많다. 진보던 보수던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당장 어제 치루어진 10.28재보선을 봐라 국회의원 뱃지 하나 얻겠다고 보였던 양당의 추태가 가지는 무게는 동일하지 않았나.


하지만 앞의 베르베르족에 대한 설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적 이익을 궁극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 보다는 이를 제어할 역할을 맡은 공적 권력자들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봐야한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서 자기 눈앞에 있는 '이익' 밖에 못 보는 족속들이다. 공동체나 조직의 원할한 유지나 존속, 또는 발전을 위해서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제어자들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때로는 제어하고 때로는 학습을 시켜줘서 인간에게 사적 이익을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켜 줘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일깨워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공적 권력자들은 이를 제어할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극적으로 처신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점이 공적 권력자들에게 있다고 보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화전민사회.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을 보면서 씁슬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으로만 보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은 정확한 판결을 내렸다. 사법부는 입법부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 입법부의 책임은 입법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이 걸렸다고 추정되는 재판에 대해 관습헌법까지 끌어들이며 적극적인 태도로 나섰던 재판관들은 막상 책임이 지워지고, 사적 이익을 제어하는 공적 권력자로서의 의무가 주어진 재판에서는 '법 자체로만' 해석하는 소극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를 두고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 무리인 걸까.


조선 시대 내내 문제가 되었던 사안은  화전민 사회였다. 울창한 숲 안에서 불을 지르고 재로 토지의 질을 돋우게 하여 그 안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유난히 관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법외의 신민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숲에 불을 지르고 토지의 질을 돋우는 댓가로 그 다음해 홍수가 쏟아 지면 하류에 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산사태로 말이다.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 숲에 불을 지르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말에 따르면 합리적인 인간의 이기적 행동이지만, 그 댓가는 모든 사회의 피해로 돌아왔다. 개인의 이기적 행동에도 해야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 최대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이 화전민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는 서로 서로 숲에 불을 지른채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마땅한 덕목이고 개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니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제어해야할 공적 권력자들도 저 마다 숲에 불을 지른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그 불이 피어올라간 연기를 하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위의 화전민들은 유난히도 돈이 많다.





성대사랑 펌.
(http://www.skkulove.com/bbs/zboard.php?id=fb2009&page=1&category=&sn1=&divpage=50&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6550&searchtype=)

간만에 좋은 정치 관련 인터넷 글이었음.

미디어법에 관하여,

미디어법 자체에 관한 이야기 및 잘못은 했으되 합헌이라는 어거지성 주장에 대한 분노만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헌재의 결정에 관한 해석은 매우 신선했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